『평화를 향한 근대주의의 해체』서평
근대주의를 넘어서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의 해체』서평
근대주의는 유효하다.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의 해체』속 주제의식
“근대주의는 식민주의,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로 시기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였다”- 20p
한국에서 잘산다의 논의는 결국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로 환원된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압축 성장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곧 자부심이 된다는 것을 학습한 한국인들은 결국 성장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괄목한 경제 성장에도, 한국인들은 행복하지 않다. 한국은 13년간 단 한해를 제외하고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저자는 우리가 삶의 가치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GDP를 위시한 숫자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행복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국민이 한가지의 가치만 추구하게 된 까닭으로‘식민주의’를 지적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이후 잉여생산물이 급증하자 제국주의국가들은 이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에 나선다.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가려지긴 했으나 제국주의의 시장개척은 칼과 총, 그리고 협박을 내세운 폭력이었다. 한국도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식민지 중 하나로,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겪었다.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일제의 수탈에 황폐진 영토? 착취당한 식민지민들의 삶? 모두 맞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침략자들이 이식한 ‘무력한 의식’이다. 저자가 언급한 식민주의의 시작은, 무력감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라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은 곧 ‘조선인의 민족성 자체가 열등하다는 위계질서’를 만들어냈고 식민지민은 강약, 그리고 우열의 논리를 체화한다.
이후 식민주의는 침략과 착취의 폭력성을 감춘 채 발전주의로 진화한다. 그들은 ‘저발전’을 부정한 것으로 낙인찍고 그들처럼 ‘앞선’국가가 되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고 설파하였고, ‘발전=근대화=산업화’공식이 완성된다. 따라서 한국이 불행에 허덕이면서도 여전히‘성장’에 집착하는 이유는‘근대주의’가 한국사회의 중심축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직까지 당시의 ‘앞선’국가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맞춰 둔 설정값이 유효하다. 광복 75주년인 2020년에도 한국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것은 열등한 것이라 여긴다.
근대주의가 헤쳐 놓은 한국사
그러나 ‘경제 성장’이 유일한 가치인 국가의 국민들은 행복할 수 없다. 여전히 한국인들이 불행한 이유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경제의 힘은 강력하다. ‘경제’를 외치면 독재자도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되기도 하고, ‘경제’를 외치면 사업가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경제’를 외치면 식민지배가 미화되기도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자본주의라는 ‘하여간 좋은’것과 손을 맞잡고 한국사회를 희롱한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것과는 별개로, 조선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식해주고 그 결과로 경제 총량이 확대해 이후 산업화의 자산이 되었으니,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에 가져다 준 이점도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주장에 호도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국가를 빼앗긴 아픔에 같은 민족으로서 공감하면서도 당시에 있었던 조선의 발전 사실에 꺼림칙한 긍정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전면 비판한다. “수요공급론에 매몰된 주류경제학 방법론으로는 식민지 사회도‘자유로운’시장경제로 운영되는”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사실 이 과정에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조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저자의 생각처럼,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것은 식민지에 적용할 수 없다. 우선 식민지민들의 경제적 자유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든든한 ‘국가’가 없기 때문이고, 사실 일제가 한국에 들여놓은 근대화, 자본주의, 발전과 같은 허울은 결국 일제의 수탈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조선에 새로운 경제 제도를 씌워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선인들은 의무교육과 참정권에 배제되어있었으며. 일자리에서도 조선인들은 절대 고급 기술력으로 기르지 않았다. 책에서는 패망이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들이 철도 운영에 필요한 핵심 기술과 관리 영역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괜히 그들의 심기를 건든다면, 기술 이양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비열한 통치는 결국 나라 찾은 기쁨조차 맘껏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비통한 조선인만 남겼다.
이러한 식민지조선의 진실에도 버젓함에도, 편파적인 사실만을 엮은‘식민지근대화론’을 들고 뉴라이트 집단이 한국사회 등장하였다. 뉴라이트는 역사학계가 ‘폐쇄적 민족주의’에 갇혀 식민지 시기의 발전을 저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의 언급한 것처럼 경제 성장 수치만 주목할 게 아니라 그러한 성장이 정말 조선인들의 ‘자유’를 확대에 기여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뉴라이트 집단의 다른 속내를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민’의 정신을 계승한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1990년 소련이 해체된 후, 모든 이념전쟁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한국에서 이념갈등은 여전히 굳건하다. 북한의 존재 때문이다. 옆 나라 일본의 총리가 북한 도발을 이유로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하거나 우익집단의 결속을 공고히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북한을 핑계로 위기를 조장하여 몸집을 키운 세력이 있다. 그들은 보수를 자처하며 광복절을 건국절이라 주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며 태극기를 휘날린다. 그러나 ‘광복절은 건국절이다’라는 주장에는 식민지 조선시기의 일제의 침략, 그에 맞선 조선인들의 저항과 독립의지를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저자의 언급처럼 그들의 ‘자유’는 자본 축적의 자유만 의미할 뿐, 학문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 등은 고려의 대상에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칭 ‘보수 세력’의 외침은 강력하다. 당장 지난 8월 15일 광화문에서 열린 보수 집회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이 여실히 드러난다.『평화를 향한 근대주의의 해체』가 제시한 혜안을 되새겨야 할 때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보수 세력의 간사한 세치 혀에 솔깃하는 이유는 근대화, 발전, 경제 성장 등의 자본주의 가치들을 옹호하며 자본주의를 비판 없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식민지 이후 주체로서의 ‘민’의 정신을 되새기기도 전에 우리는 수입된 이념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휴전으로 그친 전쟁 후엔, 끊임없이 북한과 비교하며 체제경쟁을 벌여야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탄압 당했다. 반공을 내세우지 않으면 곧 빨갱이가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말‘자유’로운 목소리는 실종됐다. 오직 성장, 그리고 성장을 보여주는 수치에만 목을 매었다. 한국은 일제로부터 독립했고, 주권도 회복했으며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 시절 ‘앞선’국가들이 새겨놓은 근대화 만능론은 여전히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의 해체』의 핵심은 ‘평화’다. 이제는 강제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체성을 가지고 평화를 정의했던 3·1운동의 맥을 이어 수치의 평화가 아닌, 모든 인간존재를 바탕에 둔 평화를 찾아야 한다.
입상 불발하면 실패한 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