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나'
세계 속에 내가 있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실감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IS가 프랑스를 테러했다고 해서 내가 다니는 학교가 휴교하는 일은 없다. 달러나 엔화의 가치의 변동이 있다고 해서 내 용돈이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일도 없다. 더욱 가까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나는 아침에 밥을 먹고 밤에는 잠을 자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반복한다. 세계의 움직임이 내 삶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하나 체감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아직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이고, IS와 같은 테러단체가 존재하는 분쟁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한국이 아니라 시리아에 살고 있다면, 내일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리아에 살고 있지 않다.
‘세계 속의 나’는 대단히 당연한 명제지만 전쟁이나 테러와 같이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세계의 문제를 내 문제라고 인식하기 쉽지 않다. 문제의식이 없으니 평화라는 환상에 도취돼 세계의 문제는 과거에는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해결할 수 없는 성질로 바뀌어 버린다. IS는 한 해 국방비에로 천조를 지불하는 군사대국인 미국조차 통제 불가능하고, 북한의 핵문제 역시 미국은 ‘휘둘리기’일 수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이 성공한 것이라면 이제는 북한이 ‘게임 체인저’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이 외면하고, 세계 시민들이 외면한 대가로 서쪽에서는 악명 높은 테러단체가 분쟁을 주도하고 동쪽에서는 북한이 평화를 들쑤시고 있다. 나도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입고 자고 먹는데 문제가 없다고 해서 세계의 문제에 눈을 감아버렸다. 해변에서 숨을 거둔 채로 발견된 아이를 보고 가슴 아파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 아이의 죽음은 나와 닿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평화를 위협할 때는 위험하다는 생각보단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낱 소시민인인 내게는 언론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북한 정말 ‘도발’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하더라도 한반도에는 전쟁이 없었다. 한 평조차 차지하지 못하는 육체로 북한이, 세계가 나와 연결되어있다고 느끼기 위해선 상상력이라는 엄청난 정신적 노동이 필요했지만 굳이 내가 그래야하는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테러의 문제, 북한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으로 고착되어 버렸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 세계 시민은 기존 체제가 계속해서 지속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패권이 교체될 때마다 세계에는 피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에 현 상태를 되도록 오랫동안 유지하는 게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규정한 이기적인 평화는 다시 이기적인 분쟁으로, 전쟁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수많은 ‘나’로 구성된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게으른 상상 때문에 또 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특히 분단국이기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할 북한문제에 대해 둔감해진 한국인들과 그에 속해 있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미 오래전 와해되어버린 ‘이데올로기 냉전’의 불씨가 살아있는 곳이고 한반도의 냉전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너무도 간과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문제가 진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개인의 안위만 생각한 이기심 때문이고,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연결 지어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 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