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이 있어야지
사람이든 동물이든 지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녀문같이 강요되고 만들어진 지조말고 사람 사이의 신뢰를 지탱할 수 있는 지조를 말하는 것이다. 열녀문은 시대가 지나면서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의 삶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 간의 신뢰를 지키는 지조는 시대가 변해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물론 '남자'의 지조만 평가받는다는 점은 충분히 문제가 있다)
소통을 꺼린다지만, 소통의 창구가 넓어진 스마트 세상의 특성상 보고싶지 않아도 듣고싶지 않아도 보이고 들린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SNS를 조금만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집에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하고 SNS엔 친구들과 놀러간 사진을 올리는 머리가 입을 따라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띤다. 뿐만 아니다.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일회용품을 애용하고 거위털 패딩을 입는 사람도 있다.
일관성없는 말은 잘못이 아니나 일관성없는 사회생활로 누군가 상처받고 불쾌해졌다면 그것은 잘못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앉아있는 의자도, 내가 기대고 있는 책상도 연필도 지우개도 심지어는 옆의 친구도 '영원'한 것은 없었다. 모두 언젠가는 깎이고 썩어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것을 갖고 싶어서 이런 결론을 냈다. '정신'은 영원한 것이라고. 내가 영원을 생각하는 지금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억지 결론을 내버렸다.
지금 내가 억지 부지고 싶은 영원한 가치는 지조다. 겉은 변하더라도 한결같은 마음만이, 한결같은 본질만이 내 삶을 의미있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부러지는 것보다 휘어지는 것이 낫지 않느냐, 이제는 지조보다는 융통성이 우선인 가치가 되지 않느냐 물을 수 있다. 융통성도 지조도 다 맞다. 틀린 것은 없다. 다만 융통성이라는 것이 당신의 입맛을 맞추기위한 조미료가 된다면 당신에게 해로운 것이 된다.
결국 내 가치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겠지만, 그 선택이 당신에게도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해로운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