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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

퇴사

*!*b 2023. 10. 7. 22:54


그가 퇴사했다. 나보다 그사람이 먼저 회사를 나갈지는 몰랐다.

그는 내 첫 선배였고, 팀장이었다. 
그에게 배운 것이 참 많다. 나는 기사의 ㄱ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나를 기사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탈바꿈시켜준 인물이다. 

그는 기자 일에 짙은 판타지가 있던 사람이었다. 현장에서 땀 흘리는 기자, 무모한 취재를 기자의 능력이라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게 틀린 건 아니었지만 팀의 속성과 팀원들에 대한 회사의 대우와 맞지 않아 반발을 샀다. 판타지와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후배들은 그의 뒤에서 원망을 쏟아냈다.

물론 나도 그가 미웠다. 구체적으로 나를 이 회사, 이 부서에 잡아둔 것 자체가 미웠다. 선배라면 말해줬어야 한다. 이 팀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너는 정도로 가라고 따끔하게 충고해줬어야 한다. 

그가 내 팀장이었을 때는 발제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일요일에서 월요일 아침이 밝는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운 것도 셀 수 없다. 세상에 이미 나온 이슈를 두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길 바랐다. 갓 걸음마를 배운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구린 발제에 타박을 놓는 일, 그런 게 선배 기자의 참된 도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며 기사를 써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저분한 기사까지 써내야하는 디지털 부서의 기자. 그래서 자극적인 기사만 쓰는 건 아니냐 낙인찍힌 기자. 좋은 기사를 써도 트래픽성 기사와 금방 뒤섞여 버리고 마는 현실. 게다가 난 당시 고작 인턴이었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리고 회사 내부의 누구도 우리 부서에 '질 좋은 기사'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와 팀원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이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나쁜 거 였다. 죄목으로 따지면 직권 남용죄와 비슷하다.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으니까. 부서의 취지를 잘 살리지도 못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라며 최저임금 받는 후배들을 교육을 핑계로 쥐어짠 죄.

나는 점점 낡아갔다. 꿈꾸던 나와도 점점 멀어졌다. 트래픽과 질, 이 둘을 모두 갖는 건 마치 날씬한 코끼리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 짐을 고작 인턴따리에게 던져준 그가 미웠다.

그런 그가 떠났다. 그는 올해 초 인사에서 좌천을 당했다. 회사는 그의 퇴사를 응원하는 부서 하나를 만들었다. 말이 '팀'이었지, 부서원은 그 한명이었다. 결국 그는 7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는 내게 퇴사한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팀에 뒤늦게 들어온 부장이나, 다른 선배에게는 따로 퇴사한다고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하긴, 그가 좌천된 후 나는 한번도 그에게 연락을 하거나 말을 붙인 적이 없이 없다. 무응답으로 그의 통치기에 항의를 했고, 나의 불편한 심기를 그도 눈치를 챈 셈이다. 

정말 정말 미운 그였지만, 그의 퇴사가 달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토록 경계했던 애증이 들썩였다. 그는 큰 소리 내는 법이 없었고, 가끔은 40대 남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유머러스했다. 존경받는 선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내 민원도 곧잘 받아줬고 정의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나를 뽑아준 덕에 글밥을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나는 어쨌든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벌고, 적당히 사람 노릇하며 살아간다.

내 직장생활 목차의 한 장이 넘어갔다. 이젠 나의 시간이 왔다. 그에 대한 묵은 감정은 이 글에 모두 묻으려고 한다. 여전히 밉고 고마운 사람이다. 그가 다른 회사에서 더 잘 돼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하고 한잔 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닿지 않을 한 마디 마저 남겨본다. 잘가요.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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