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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판단

뭐든 쉽게 쉽게. 머리 복잡해지는 일은 싫었다. 특정 주제 이외의 일들에 머리 굴리는 일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글이라는 게 내 머리 속에 있는 유일한 진리였고 그래서 신문 죽어라고 팠다. 그런 날이 거의 1년 째고, 나는 경향 공채에서 1차에서 떨어졌다. 문제는 내 자소서 따위가 아니었다. 정량적인 스펙이 허무맹랑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 여기서 내가 생각했어야 하는 일은 '더 열심히 공부하자'였지만, '경향 아니면 어때, 글만 쓰면 되잖아?'였다. 그런 생각으로 사람인에 게시된 '기자관련 직무'에 무작위로 이력서를 넣었다. 연락온 곳은 2-3곳. 적당히 추린 곳이 1곳이었다. 

오늘 면접을 봤다. 면접 전에 회사 규모, 회사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잔재주도 조금 부려본다고 템플릿을 사서 만든 포트폴리오도 준비해갔다. 아무리 작은 회사에 지원했어도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곳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상을 아낄수록 그 대상이 더 값지게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어려움을 멀리한 대가

시간 맞춰 도착한 회사는 한 눈에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작았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편집국장실과 기자 사무실이 문 하나로 나눠져 있었다. 발행된 신문들도 잔뜩 깔려있었다. 책꽂이에도 본래 색을 유지한 신문부터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노랗게, 거의 석양빛으로 물든 신문들까지 가득 차 있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신문이었어도 내가 쓴 글이 실릴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들떠있었다. '작으면 어때, 신문사잖아'.

 

 

 

 

그 때 날아온 쪽지
잠시 대기하는 중이었다. 앉은 쪽 앞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한 기자분이 내게 "이거 떨어뜨리셨어요"하며 무엇을 주었다. 평소에도 잘 흘려서 내가 카드를 흘린 줄 알았다. 보니 카드가 아니라 쪽지였다. '첫 출근했는데 탈주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유튜브 웹드 좋좋소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받은 쪽지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갔지만, 선배의 말은 들어서 나쁠 것이 없어 쪽지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문자를 넣었다. "여기서는 하는 일도 없고(배울 수 있는 일이 없고), 실세 기자는 자기 자랑만 하며 심지어는 룸쌀롱 얘기까지 서슴치 않고 한다"고 한다. 첫 면접이었다. 내 글쓰기를 더 넓은 세상에 그것도 돈을 벌면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부푼 마음으로 온 곳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노동자는 돈이 안 돼. 연봉은 2400이고.

'그래. 온김에 면접이나 보고 가자. 공짜잖아'. 사실 공짜는 아니었다. 교통비가 들었고 신을 구두가 없어서 오만원 주고 구두도 샀다. 자켓과 셔츠는 각각 동생과 친구에게 빌렸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박 면접같은 건 없었다. 편한 분위기였고 자소서 위주로 질문을 했다. 부담감이 전혀 없어서 그런지 말이 술술 나왔다. 아. 생각해보니 '주량이 어떻게 돼냐, 통금시간 있냐, 언론사는 새벽 5시까지 술먹고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할 수 있냐' 정도는 압박 면접이었던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자도 처음 봤겠다, 나는 궁금한 거 있냐는 질문에 주저않고 질문했다. 학교 다닐 때도 질문왕이었다. 

첫째, 200만 건설인을 위한 신문이라고 하셨는데 기사를 보니 기업인 위주더라. 노동자의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  둘째, 중대재해처벌법같이 양쪽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경우 어떻게 하느냐 
셋째, 내 의견과 데스크 의견이 다를 경우 어떻게 하느냐 

뭐 이 정도였다.

결국 '광고주(기업인)을 위한 글을 써야한다'가 결론이었다. 기업인 이외의 사람들은 신문을 사지도 않고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신문사를 먹여 살리는 건 기업인이니 기업인을 위한 글을 써야한다고 했다.

노동자의 딸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난 기업인보다 노동자의 시선에 더 가까운 편이었고 기업이 죽음으로 모는 사람들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돈을 까먹는 존재'로 여기니 4년제 대학을 나온 내 연봉도 2400만 원이었다. 중식은 제공되지 않는단다. 쪽지 제공자는 "이런 데도 우리 정도 학교가 마지노선이에요"라고 말했다.

쪽지를 받은 후 구겨진 마음은 연봉 이야기로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됐다. 

 

내 존엄을 지키는 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은 곳도 괜찮다. 워라밸을 지킬 수 있고, 관심있는 일을 할 수 있고, 근로기준법에 맞춰 노동소득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중소기업이든 소소기업이든 괜찮다. 회사 이름을 내 명예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오는 길에 한국언론진흥재단, SK 이런 곳들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으니 부럽긴 했지만. 

이 사회에서는 '소득'이 곧 존엄이 된다. 이천사백. 내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새벽 5시 퇴근해도 수당이 따로 없고, 술 마시지 않으면 업무가 어렵다는 언론사의 그른 관행을 웃으며 받아드릴 정도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런 '나쁜 관행'이 쌓여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청년을 죽게 내몬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죽을 정도로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글도 블로그에 쓰면 그뿐이다. 나는 나의 삶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 크게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뒷내용이 이해가 안 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느리더라도 다시 해보려고 한다. 괜찮다. 늦고 빠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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