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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인스턴트 자존감

*!*b 2018. 5. 23. 20:44

온갖 것들이 거슬리는 날이 있다. 부스스한 머리칼도, 여기저기 솟아난 뾰루지도, 후진 바지 핏도 모든 것이 거슬리는 그런 날이 있다. 출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관문 밖을 나서면서도 얼른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속박한다. 인간의 모습은 대게 완벽하지 못한 날이 많을테지만 그날따라 마음에 걸리는 온갖 것들이 내 하루를 자유롭지 못하게 옥죈다.

아침부터 생각했던 나의 부족한 모습을 누군가 지적이라도 하는 날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이 나를 덮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타인의 작은 말 한마디가 나를 걷잡을 수 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타인이 나를 구속하려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자승자박하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들을 놓쳐왔다. 솔직하게, 지금까지 스스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며 거짓말을 쳐왔다. 남을 속인 게 아니라 나를 속여왔다. 나는 나조차도 속이는 완벽한 거짓말쟁이다. 가끔은 높은 시력을 가진 내 두 눈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차라리 내가 눈이 먼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거울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을텐데, 못난 내 모습에 자괴감들지 않을텐데 생각할 때도 있다.

나의 자존감은 내가 살을 빼고 꾸밀수록 '편했던 나'와 멀어질수록, 높아져왔다. 나는 외모를 가꾸며 가짜 자존감을 높여갔다. 그래서 내 눈을 만족시킬수 없는 모습이 거울을 차지할 때면, 그토록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모습들에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서는 길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사회가 설정한 미의 기준에 더 가까운 사람들을 볼 때면, 보잘 것 없는 나를 책망하고는 했다.

나의 신경은 온통 '보이는 것'에 쏠려 있었다. 시간을 내서 다이어트 식품을 챙겨먹어야 했고, 하루에 일정시간 이상 운동을 해야했다. 이게 내 이십대 초반이었다. 내적성취에서 오는 것이 건강한 자신감이라면, 나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인스턴트 자존감'인 외적성취에만 매달려왔다.

오로지 보이는 것에 집중한 삶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다. 남들로 부터 받은 평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인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불편하게' 다가오면서도 나는 스스로 평가의 대상이 되고자 자처하고 있는 것 같다. 평가받는 위치가 내 자신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음에도 이 굴레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나도 안다. 사회가 여자에게 강요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치사하고 잔인한게 여자를 지배하지는 지를. 사회가 제시하는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냥 다 벗어버리면 되잖아' 한 마디로는 모든 짐을 던져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의 삶의 방식, 삶에 대한 인식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그래왔듯이,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란 것을 믿어보고 싶다. 날 속박하던 것들을 하나 둘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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