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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어데 최씨입니꺼?”
영화 <범죄와 도시>의 대사로 처음 보는 상대의 성과 본관은 물론 파와 항렬까지 줄줄이 나열하며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이 되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가 그려진다. ‘집단’을 중시하는 한국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설령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끌어주고 밀어주는 게 한국의 오랜 관습이다. 그래서 가진 이들이 학연·지연·혈연을 총동원해 공고한 카르텔을 건설하고 그 카르텔을 이용해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까지 독점한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발전하며 그것이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지위를 이용한 특혜는 여전하고 학연·지연·혈연은 더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가 더 교묘해져 ‘합법적 특혜’라는 말도 생겼다. 여전히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돈이 많으면 ‘정보’에 접근하기 쉬워서 ‘합법적 특혜’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문제는 사회엘리트 계층이 조용히 누리고 있는 이 특혜를 통해 부와 지위를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고학력 부모의 자식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일보 탐사보도팀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2019년 신입생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년 대졸 이상(석박사 포함)인 경우가 아버지는 77.5%, 어머니는 71.5%인 반면 부모가 고졸 이하인 경우는 한 명도 없었다. 부모가 가진 부와 지위를 이용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누리고, ‘스펙’이 될 만한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스펙’도 차곡차곡 쌓은 고학력 부모를 둔 자녀들은 명문대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쟁취한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부모라는 유리한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개인이 둘러 쌓인 환경은 능력을 성취하는 데 가장 큰 요인이다. 그래서 부모가 제공하는 환경에 따라 개인의 능력은 사장될 수도, 발굴될 수도 있다. 개인의 능력이 노력이 아니라 환경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유력한 사회지위가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구나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에도  모든 백성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지만 생계 때문에 책 근처에도 가지도 못한 채 대대로 평민으로 살았던 것과 같다. 따라서 공정한 시스템이 담보되고 개인의 노력이 지극했다할지라도 사실 부모의 지위라는 주어진 환경을 더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부모의  이미 뱃속에서부터 나뉜 출발선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라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 


우리사회는 부모의 지위가 곧 자녀의 능력이 되는 능력주의의 허점을 짚지 못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경쟁을 공정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한 쪽에만 유일하게 설계된 경쟁의 반칙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공정을 가장한 경쟁에 속아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능력이 없어서 ‘가난하다’는 혐오를 쏟아내기도 한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비정규직을 향해 ‘능력없는 200충’이라는 혐오발언을 쏟아낸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래서 합법적 특혜 혹은 합법적 불공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질 좋은 교육과 정보의 격차로 학벌이 달라지는 만큼, 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을 만들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협업을 해야할 것이다. 또 정부가 누구나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한 사람의 양육을 가정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정부가 함께 짊어짐으로써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폭넓은 복지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더 촘촘히 설계하는 것이다. 
또 능력주의 실현을 가능케했던 학벌중심의 사회를 포괄적 차별방지법 제정으로 극복해야 한다.  포괄적 차별방지법이 제정된다면, 학력이란 능력이 아니라 직무수행이 중심인 채용을 통해 학력으로 사람을 걸렀던 기존의 관행을 법적으로 제지할 수 있다. 따라서 학력이 용인했던 차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꼼꼼하게 법을 제정해야  ‘공정’한 사회로 이행하며  “어데 최씨입니꺼”같은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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